손주를 다시 키우게 된 조부모들, 보이지 않는 위기

손주를 다시 키우게 된 조부모들, 보이지 않는 위기

은퇴 후의 삶을 그리던 시기에 갑자기 손주를 전적으로 떠맡게 되는 조부모가 늘고 있다. 사이콜로지 투데이(Psychology Today)는 이를 '숨겨진 유행병(hidden epidemic)'이라 부른다.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이미 상당수 가정에서 조용히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라는 뜻이다. 2024년 9월 기준 미국에서 조부모나 친척의 손에 자라는 아동, 이른바 '그랜드패밀리(grandfamily)'는 240만 명에 달하며, 이 가운데 33%는 6세 미만, 35%는 6~11세, 32%는 12~17세다. 이 조용한 위기는 대체로 예고 없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찾아온다.

로라 브라잔의 이야기가 그 단면을 보여준다. 해외여행 중이던 그와 남편은 아동보호서비스로부터 걸려온 전화 한 통으로 하루아침에 손주들의 보호자가 됐다. 아이들의 친모는 방임과 학대로 수감됐고 친부는 1년 넘게 연락이 끊긴 상태였다. 아이들과 혈연으로 이어진 쪽은 남편뿐이었고 로라 자신은 친할머니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아이들이 위탁보호시설로 보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망설임 없이 나섰다. 은퇴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부부는 여행지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을 계기로, 준비할 겨를도 없이 하루아침에 전업 양육자가 됐다.

처음 데려왔을 때 아이들은 엉킨 머리카락과 상처가 낫지 않은 피부, 심한 정서적 불안정을 안고 있었고, 낯선 두려움 속에서 규칙적인 생활에 적응하는 것조차 버거워했다. 이후에도 진단조차 받지 못한 난독증 같은 학습 문제가 뒤늦게 드러났다. 로라는 이 시기를 압도적이고 고립감이 크며 정서적으로 진이 빠지는 시간이었다고 돌아본다. 아이들은 새로운 규칙과 돌봄 방식에 좀처럼 마음을 열지 못했고, 부부는 손주들의 두려움을 하나씩 풀어주는 일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로라는 아이들의 트라우마가 시간이 지나 성장 단계마다 다른 방식으로 다시 불거지고, 예전에는 몰랐던 새로운 학습·발달 문제가 계속 새롭게 드러난다고 말한다. 아이를 사랑하고 안전한 울타리를 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부모 양육자들이 겪는 어려움은 트라우마와 신경다양성, 법적 문제까지 여러 겹으로 쌓인다. 로라는 학교나 지역사회에서 마주치는 훨씬 젊은 부모들과 나이 차, 삶의 경험 차이에서 오는 소외감을 크게 느꼈고, 가족이 이런 상황에 이르렀다는 사실 자체에 수치심을 느끼기도 했다. 무엇보다 힘든 것은 조부모 양육자에게 맞춘 자원과 지원 체계가 턱없이 부족해, 필요한 도움을 찾는 과정 자체가 끝없이 소모적이라는 점이었다.

도움이 절실했던 로라는 몬태나주립대학교의 친족돌봄자 프로그램(Kinship Caregiver Program)을 통해 비로소 실질적인 안내를 받았고, 이후 이 프로그램의 또래 코디네이터로 직접 활동하게 됐다. 자신이 겪었던 막막함을 이제는 같은 처지의 다른 조부모들에게 방향을 제시해주는 역할로 되돌려주고 있는 셈이다. 동시에 자신의 경험을 나누고 정보를 모으기 위해 팟캐스트와 뉴스레터를 시작했는데, 지금은 애플과 스포티파이에서 비슷한 처지의 조부모들에게 정서적 지지와 실질적 조언을 건네는 대표적인 채널로 자리 잡았다. 이런 친족 돌봄 안내 프로그램(kinship navigator program)은 이 조용한 위기 속에서 실질적인 방향을 제시해주는 중요한 통로라고 로라는 강조한다.

로라는 손주 양육이 누구에게나 맞는 길은 아니며 그래도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일단 그 역할을 맡은 사람이라면 수치심을 느끼거나 혼자 버텨서는 안 된다고 힘주어 말한다. 그는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지역사회 단체와 전국 단위 조직, 소셜미디어를 통해 먼저 연결되라"고 권하며, 연결과 공동체, 그리고 이런 현실에 대한 인식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어 "나이가 아니라 사랑이 가족을 만든다"고 말하고, "자기 자신과 가족을 위해 목소리를 내라. 그랜드패밀리를 위한 더 나은 지원과 자원을 마련하려면 정책 변화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원본: Psychology Today